유사과학을 혐오하는 내가 MBTI 광풍에 감사하는 이유
2024-07-25
제목을 자극적으로 작성했지만, 유사 과학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일 뿐 유사 과학을 즐기는 사람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유사 과학을 근거로 남들을 힘들게 하거나 선량한 사람들을 속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혐오하지만 유사 과학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오히려 인간 본성의 건강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TL;DR
MBTI는 혈액형 성격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지옥에서 나를 구원해 준 단비와도 같은 존재. 이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감사할 수밖에 없음.
MBTI는 일반적인 자기 보고식 검사가 가지는 한계를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유형 분류의 단순함으로 여러 에지 케이스를 담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음. 하지만 범주론을 통해서 많은 철학, 사회학적 발전이 있어온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대중 전반에 대하여 본인 및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봄. 이 도움은 MBTI 광풍의 암부라고 할 수 있는 선입견과 편견, 본인을 한정해서 다른 방식으로의 사고를 제한하는 단점들보다 더 큰 효용을 주고 있다고 본인은 보고 있음
사회적 비용이 효용보다 컸던 혈액형 성격론의 유행
어떤 술자리든 친목 모임이든 혈액형을 물어보고 성격에 대해서 추정하는 재미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있곤 했다.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AB형입니다.”
“아… 미ㅊ..”
어느 순간부터 진지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사람들의 하나의 여흥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상황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특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본인의 성격이 혈액형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좌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심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여흥으로 즐겼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으며 자신도 모르게 좋은 사람을 곁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경우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외교관이니 관리자니 하는 캐릭터와 함께 많이 보던 알파벳이 나열된 그림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혈액형을 대체한 유사 MBTI의 유행
어느 날부터인가 양자택일 형태의 질문지와 다르게 양자택일이기는 하지만 강도를 선택하게 하는 16 Personalities라는 유사 MBTI 검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실제 MBTI 검사지의 질문도 한계가 명확한 질문은 많이 있었기에 질문의 의도까지 고려해서 답변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유사 MBTI는 질문의 개수(양자택일에서 강도를 선택함으로써 질문 개수를 적게 가져가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모호성 등은 그보다도 더 좋지 못했다. (개편되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양자택일 성 질문으로 인한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불가한 검사 결과를 참된 분석 결과라고 받아들이면서 앞서 언급한 역기능의 발현이 비슷하게 관찰되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혈액형 성격론에 의한 역기능보다는 압도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었다) 혹자는 유사 MBTI의 한계를 논하면서 실제 MBTI가 아닌 검사를 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유사 MBTI든 MBTI든 본래 목적인 직업 선택에서 성향 확인을 제외한 부분에서 사용될 경우에 발생하는 역기능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액형 성격론보다 좋았던 이유
굳이 설명이 필요할 까 싶지만 자기 보고식 검사이기 때문에 메타인지가 뚜렷한 사람일수록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검사에 임한 내용에 대한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인 결과이므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명확하지만 “나는 이런 성향의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해” 라는 측면에서는 범주라는 도구로 많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순기능은 명확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기능 측면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고 어떠한 신뢰할 만한 근거도 없는 혈액형 성격론과는 달리 본인의 진술에 근거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심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타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흔히들 MBTI가 변한다. 검사할 때마다 달라진다는 사실은 자신의 성격이 변화할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며 이는 스트레스 취약계층에게는 매우 큰 요소로 작용한다고 본다.
MBTI의 순기능이 역기능을 넘어섰다고 생각한 순간
해외에 오래 체류한 경험이 없어 한국인의 종특인지 모르겠지만 유행에 민감하고 유행을 따라가려는 본능이 크며 이로 인해 아싸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과 인싸가 되는 것을 즐기는, 또한 순수하게 성격 유형론에 대한 흥미가 커진 집단들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본래의 MBTI의 철학을 넘어서는, 혹은 그 범주화의 본질적 분류 이유를 탐구? 하는 식의 집단만의 새로운 해석들을 내놓기 시작했고 어느샌가 여론 형성과 같은 결로 사회적 이론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의 결과가 본래의 MBTI보다 심리학적으로 더 높은 신뢰를 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의 많은 비율이 범주화의 의미를 곱씹으면서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본래의 것과 다르다 할지라도 전반적으로 인간 성격의 범주의 다양성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는 명백한 순기능이 크게 작용하도록 했다.
너 T발C야?
위의 문구만 보면 “이건 명백히 역기능이 아니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역기능이 맞다. 다만 내가 보는 것은 그 아래 깔린 것인데 이 명제 안에서도 그렇고 작금의 사람들의 인식에 있어
“사람은 이래야 해” 가 아니라 “사람은 T라는 유형과 F라는 유형의 사람이 동시에 존재해”라는 사실을 자동빵으로 깔고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자체가 어떤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실제 인류의 성격이 외향, 내향으로만 구분될 수 없고 수많은 에지 케이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구분이 옳고 옳지 않고를 논의해야 하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학자들의 몫”인 것이다. 물론 더 깊은 개념을 더 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고 순기능이 더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다른 면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해 왔던 여러 사회적 비용들을 고려한다면 효용성이 압도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F의 성격이라 딜이 씨게 박히지만 T는 조준 사격을 한 게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패시브 스킬이 발동했던 것이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공감하기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구나 어쩌면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었던건가”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자고 했을 때
이전 같았으면 “하.. 저놈은 나만 보면 XX이네” 였겠지만 실제가 그렇든 그렇지 않든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고 적어도 진의를 확인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조금 더 보탬이 되는 건 명백한 사실인 것 같다. 여기에서 T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커뮤니케이션의 진전이 이전보다는 있을 것이고 이는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 효과만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고 본다. (물론 극단적 예외 케이스가 있을 수 있겠지만 충분히 비비고 넘어갈만한 수준이라고 본다.) 이는 알다시피 T냐 F냐뿐만 아니라 MBTI가 구분하는 범주 모두에 해당한다. 이는 사회적 비용인 ‘개인의 스트레스에 대한 보정’이나 ‘커뮤니케이션의 진전’에 있어서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압도적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기능을 말하면서 MBTI 광풍을 비판적으로 말하는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은 명백한 사실이다. 역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순기능의 적은 감소와 함께 역기능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현자의 말도, 어떤 정치인의 외침도 대한민국 국민 전반의 상호 이해 성향을 이보다 높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대놓고 MBTI 광풍을 빠는 게 아니다. 나는 이런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고 담담하려 노력하는 스포츠 중계방송의 해설자쯤 되는 사람이 예상치 못한 플레이어의 뜻밖의 움직임을 보고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를 전달하려고 입을 터는 상황과도 같다. 단지 그 플레이어가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플레이어일 뿐이다.
물론 위와같은 단순한 문제도 있지만 이 마저도 혈액형으로 1/4을 날려버리는 것 보다는 1/16을 날리는게 그나마 나은게 아닐까?ㅎㅎ 나아가 개인의 귀납적 추론으로 특정 집단을 피하는 것은 생존 본능상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MBTI 광풍은 계속되어야 해?
성숙? 한 만큼 역기능도 늘고 있다. 많은 MBTI 유행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의 시각이 이런 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겠고 예를 열거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짚어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잠시만 언급하고자 한다.
많은 문제의 원인은 사람들이 실체와 언어 간의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본다.
본인은 근대 철학에 뒤 이어 등장한 사조들에 대한 흥미가 적어 이를 표현한 분명한 이론이나 단어가 있음직하지만 특정하지는 못하겠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이나 언어철학을 다룬 사람들의 이론에 비슷하게 정리된 것이 있을 것 같다.
언어는 현상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인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평소에 이런 사고를 즐겨 하지 않는 사람일 경우, 애써 신경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언어가 현실의 표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언어 자체가 곧 현실이라고 (엄밀히 말하면 별생각이 없이)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경우와 아닌 경우 다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그 사람이 외향의 성격을 가졌는지 내향의 성격을 가졌는지를 밝히려고 함
- 그 사람의 성격이 성격 그 자체로 존재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이 외향인지 내향인지를 하나의 도구로 인지하고 이를 사용해 분류하려고 함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차이가 개인이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부여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많이 신경 쓰는 취약계층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굳이 이 글에서 디테일한 해결 프로세스까지 제시할 정도로 깊게 고민해 보지는 않았지만 고민해 본다 한들 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무언가를 제시하는 것 이상의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단순히 본인이 MBTI 광풍에 감사하는 이유를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기술했을 뿐 본인이 사회의 문제를 꼬집고 환기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혈액형 이야기를 지인들과 나눌 때면 최대한 같이 즐기고자 했으나 한계가 있었으나 MBTI를 이야기할 때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적어도 자기 진술에 대한 범주화 결과물이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동어 반복이나 다름없지만 그것이 혈액형이나 점성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보니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즐겁기도 하다.
다만 이 이야기를 어쩌다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 MBTI로 인해서 막연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